나가이 고: 데빌맨 편 인조인간


저번 포스트에 이어지는 "나가이 고 빈티지 만화관" 이번에는 데빌맨 편입니다.
그림은 여전히 클릭하면 커지며, 영문판인 관계로 그림 위에 간단한 해석을 달았습니다.

읽으시기 전에 미리 변명 한마디:
-일어를 영어로 번역한 글을 다시 한글로 번역하다 보니 의역이 꽤 많습니다 (특히 끝의 두 페이지).
-나가이 고 가 일본사람이니만큼 우리와는 시각차가 좀 있습니다.

드디어 개그 만화 졸업!

몇몇 출판사를 설득, 개그 만화가로서 투고하던 시절을 마감하고 진지한 만화를 새로 연재하게 되었다. 새 시리즈는 1972년부터 1년여간 "소년 매거진"에 연재된 것으로 "데빌맨"이라는 제목이다.

데빌맨은 내가 늘 꿈꾸어 왔던 줄거리를 가진 작품이다. 하지만 막상 만화를 그리는 중에는 이야기 속으로 완전히 빠져버려, 앞으로의 이야기 진행이 어떻게 될지 나 자신도 모르는 일이 흔하였다. 데빌맨의 작업을 끝내고 나면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탈진해버리곤 하였다.

하지만 "데빌맨 작가 나가이 고"라는 이미지를 굳혀 준 작품으로,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만화이다.

"이 녀석 굉장하지 않아요? 드디어 데빌맨 얘기를 할 차례다!"

데빌맨 이야기를 하려면 마왕 단테 얘기부터 해야한다.
"개그 스타일 만화가 아니라도 상관없으니까, 어떤 것을 그리고 싶으신지 좀 설명해 주시죠." (주간 보쿠라 매거진)
"파렴치 학원같은 개그 만화가 아니라도 된단 말이죠? 좋아요 그럼 이러면 어떨까요..."

당시 나는 개그만화를 그려달라는 청에 신물이 났던 터라 이렇게 말했다. "저는 사람만한 작은 캐릭터 말고도 그릴 수 있는데요. 고지라처럼 커다란 괴물들을 그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냥 괴수만화를 그리면 고지라 흉내를 내는 게 될것 같아, 악마의 이미지와 관련있는 것을 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마왕 단테가 태어났다.
"단테라는 이름은 <신곡>을 쓴 14세기 시인의 이름에서 따왔죠. 왜 그랬냐 하면 신곡에 나오는 이미지, 즉 루키펠이 지옥 맨 아랫층 얼음속에 갇혀 있는 모습을 만화에 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마왕 단테는 연재 중단을 당하여 이야기가 중도에 끝나고 말았다. "더 그리고 싶은데... 본론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훌쩍>

그 때 토에이의 프로듀서가 왔다. "아니메의 주인공을 만들어 주세요. 마왕 단테와 비슷하지만 더 멋있는 놈으로..."

프로듀서는 나에게 아니메 주인공으로 쓸만한 악마를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만화 스타일의 캐릭터를 만드는 것은 가망없는 일이었고... "미국 만화 스타일이라.... 으~음"

그래서 토에이에게 이것저것 잔뜩 그려서 보여 줬으나... "너무 괴물같은데 좀더 사람처럼 보이게 해줄순 없나요?"
"하지만 원래 악마인데 사람 모습으로 하는 것은..."

"TV 프로듀서에게 보여줬더니 적 캐릭터로 쓰고싶다고 그러더군요."
"하지만 걔는 주인공인데!"

"흠, 사람 모습, 사람 모습으로... 인간 악마 라면 맨-데빌, 아니면 데빌-맨으로 하면 될것 아니야..." 이렇게 해서 데빌맨이 태어난 것이다.

데빌맨, <드리프터즈 쇼*>와 격돌!

(*당시 대인기였던 버라이어티 쇼 프로그램. 쵸스케 이카리야가 이끄는 "드리프터즈"라는 코메디 팀이 출연함)

데빌맨 TV판은 1972년 7월 뉴TV 아사히에서 첫 방송을 탔다. 당시 초특급 인기프로인 <드리프터즈> 프로그램과 같은 시간대에 편성되어 경쟁을 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데빌맨은 전체 시청률의 10~15%를 끌어들였다.

당시 TV 아니메는 전부 귀여운 것들 뿐이었기 때문에 데빌맨의 하드한 스타일과 액션은 시청자들에게 새로운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TV 관계자들이 "다른 시간대 편성이었다면 시청률 30%는 문제 없었을 거에요" 등의 얘기를 했기 때문에 나는 목에 힘을 주고 다녔다. 헤헤헤.

데빌맨의 얼굴은 사람의 이미지에다 악마와 흔히 연관지어지는 동물인 박쥐의 이미지를 합친 것이다.

데빌맨 TV판 기획은 순조롭게 진행될 줄 알았건만... "에~? 그건 드리프터즈 방송시간 이잖아요! 토요일 저녁 8시? 애들이 그렇게 늦게 TV를 보기나 하나요?" "대개는 안 보지요."

"아뭏든 드리프터즈는 시청률 50~60%의 대 히트 쇼니까요. 지금으로는 데빌맨을 드리프터즈 다음 시간대에 넣을 자리도 없고...하하하 참 곤란하군요." (토에이 동화 프로듀서 H씨) "흐으음"

"데빌맨을 시청률 테스트용으로 사용하시려는 것 같군요. 그런 마음가짐으로 데빌맨을 제작하실 건가요?"
"아니요! 오히려 그 덕에 더 자유롭고 유연하게 제작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 그래! 여태까지의 아니메보다 훨씬 더 하드하고 폭력적인 내용으로 만드는 거야! 사람들은 아니메를 귀엽다고 인식하고 있지... "

"그러니까 사람들의 예상을 뒤집어 깜짝 놀랄 정도로 격렬한 아니메를 만든다는 것이죠?"
"바로 그거에요. 저녁 8시면 시청자들은 성인이니까. 주인공도 악마이고..."

"또 시나리오 작가인 사키 츠지마 와 함께 일해 주십시요."
"오오~! 그거 잘됐군요."

강인하고 악마적인 이미지를 강조한 정교한 데빌맨 피규어가 많이 있는데, 수집가들이 좋아한다고.

TV판 데빌맨의 데뷰인 "마족 부활"을 보고 내 자신의 노력과 열정이 아니메로서 실체화된 것을 보고 큰 기쁨과 감명을 받았다. 스태프 여러분 모두 감사해요!"

존경받는 추리소설 작가인 사키 츠지마 씨는 당시 꽤 이름난 아니메 시나리오 작가였는데, 글의 레파토리가 아주 다양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자에 상", "이트 맨", "마법사 사리" 등등을 써서 빠르게 유명해졌다. "주인공이 악마라면 재미있겠는데요? 아하하."

츠지마 씨와 만나서 내 작품의 줄거리를 의논하는 것은 큰 영광이었다. 츠지마씨는 많은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내놓았고 나도 내 아이디어들을 그에게 선보여서 그것들을 짜맞추어 데빌맨의 줄거리를 만들어냈다.

"이러쿵 저러쿵"
"그럼 이렇게 되는거죠! 완벽해! 아-하하하하! 딱 맞겠어요!"

그렇게 되서 TV판의 제작이 시작되었다-- 만화판이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에. "그게... 만화판은 TV판이랑 자꾸만 달라졌거든요.... 하하하하..."

리얼한 장면들이 "잔인하다"는 평도 있었다!

이 피규어는 원래 800개만 제작되었다. 엄청 희귀함!

데빌맨의 연재가 시작되자 나는 나의 대표작을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였는데, 그때까지 해왔던 다른 작업들과는 그 몰입도가 완전히 달랐다. 당시 나는 다른 여러 작품들의 제작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는데, 데빌맨과 다른 작품들의 작업을 병행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결국 "동물 케다만" 과 "아바시리 가족" 의 연재를 중단하고 데빌맨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또 독자들에게서 데빌맨이 너무 리얼하다든지 너무 잔인하다는 항의 편지를 받은적도 있었다...특히 고문 장면에서 여성이 두쪽으로 싹둑 잘린 장면에 대해서 항의가 많았다. 나는 잘린 자리가 깔끔했기 때문에 괜찮을 줄 알았건만...

만화판 데빌맨은 TV판에 비해 더 호러풍, 성인 지향적인 디자인이다.

데빌맨 만화를 "주간 소년 매거진"에 연재하기로 결정했을 당시에는 "오모라이 군"이 연재 중이었다. "인기도 좋고, 잘 나가고 있어요!"
"바로 이녀석 때문에 편집장이 오모라이 만화를 때려치우자고 했을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주간 소년은 데빌맨을 연재하고 싶어했다."

"TV 아니메에서는 마족이 이유 없이 별안간 나타났지만 만화에서도 그럴 수는 없지요. 독자들이 이미 아는 얘기 말고, 악마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서 얘기를 해야 해."

"그래! 해설자 역할의 캐릭터를 만들자. 주인공을 악마들의 세계로 인도하는 사나이로 말이야."

"냉정하고 강압적인 사람이 좋겠어. 주인공은 온갖 굉장한 일들을 겪게 될 테니까... 그럼 주인공은 힘없고 얌전한 녀석으로 만들자. 후도우 아키라 라는 셀것같은 이름*을 가졌지만, 변신 전에는 빌빌하는 녀석이지." 반대로 여주인공은 배짱이 좋다. "가서 패줘!"

*후도우 아키라 (不動明) 의 이름은 불신佛神 마하바이로카나의 화신인 아카라나타 비댜라쟈 (부동명왕)의 이름에서 따왔다.

TV판과 아니메판 데빌맨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아스카 료라는 주인공이 있다는 것이다.

아스카 료. 이 주인공이 끝에서 악마들의 지배자인 사탄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작가도 예측하지 못했던 전개이다. 그런데 료가 아키라의 변화의 제물로서 죽게 되어 있는 설정인데도 끝까지 살아 있는 것은 또 무슨 이유인가? 작가도 그것이 궁금하다.

후도우 아키라 라는 이름은 부동명왕에서 따왔다. "악마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니만큼, 신들의 가호을 받아두고 싶었다는 것이죠. 업業 때문에... 닭띠 사람들의 수호신이 부동명왕입니다." 나가이 고는 닭띠임.

업장 문제를 해결해 놓고 작업을 시작했지만 뭔가 알지못할 힘이 나를 억누르는 것을 자주 느꼈다. "으윽 힘들어... 일하기가 힘들어..." 진짜로 데빌맨 만화는 나의 다른 모든 만화작업들을 합친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택일을 해야만 했기에 나는 다른 만화들의 연재를 하나씩 중단하여야 했다... 다른 만화들이여, 미안.

아뭏든... 기분 좋게 작업을 시작해도 끝날때쯤 되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아니..왜 이렇게 피곤하지? 젊은 나이 (25세) 에 내 몸이 이렇게 허약하지는 않을텐데..." 나는 영감靈感이라는 것이 없으니 작업중에 어떤 것들이 출몰했을지 누가 알랴.

늘상 "오 왔다 왔다!*" 하다보니 내가 약을 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일본식 표현. 예술가 (특히 작가) 가 영감이 떠오르기 시작할 때 자주 사용하는 감탄사.

데빌맨에서 가장 인상깊은 부분은 결말 부분일 것이다 (인류의 멸망 등). 나도 그 부분을 그리는 동안 완전히 몰입되어 그리는 손을 멈출수가 없었다.

아아, 몸도 마음도 한계라고 느껴질 만큼 정말 힘든 작업이었다. 천사가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을 본 어떤 사람들이 "나가이 고는 마약을 한다" 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물론 사실이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환각상태라기보다는 혼수상태에서 그린 만화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듯.

솔직히 데빌맨이 끝났을 때는 기뻤었다. 힘들었으니까... 그리고 대작을 완성하므로써 "나는 만화를 그려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다" 라는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고.

"어라? 이거 정말 내가 쓴건가? 너무 잘썼는데?" 나는 가끔 이런다.

"왜 이야기가 이렇게 됐지? 이렇게 되면 너무 무서운데... 이럼 안 되는데, 그래도 멈출 수가 없어."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극중 인물들의 캐릭터성이 너무 강하여 작가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일이 있습니다. 데빌맨이 바로 이런 작품의 좋은 예죠. 독자들이 이 작품을 계속 응원해 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라고 생각해요. 또 데빌맨에 등장했던 조연 캐릭터들 역시 자신들만의 생명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디오판 데빌맨은 1년의 시간과 1억엔의 예산을 들여 완성한 작품으로,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강점이다!

비디오판 데빌맨은 1987년에 "탄생"편이 처음으로 발매되었고, 다음은 1990년 "요조 시레느" 편이 나갔다. 이 두 작품은 원작 만화판의 내용을 충실하게 따랐는데 작품의 평은 여러가지였다. 나 자신은 비디오판에 대해 만족한 편이였는데 특히 주인공이 데빌맨으로 변화하는 부분의 심리적 묘사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정말 대단했던 것은 비디오 작품들에 들인 공이다. 50분짜리 비디오작품 하나를 제작하는데 1년의 시간과 1억엔이라는 돈이 들었다. 요새야 비디오작품 하나를 만들 때 2~3억엔 정도의 돈이 들기도 한다지만 당시로서 1억엔은 엄청난 비용이었다.

데빌맨의 성우는 하야미 쇼 씨로, 미형 악역 전문이다.

코단샤와 킹 레코드사에 가서 데빌맨의 비디오 아니메판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감독 후보는 이다 츠토무 씨.

츠토무 씨는 <천공의 성 라퓨타>의 조감독이었다. 미야자키 스타일의 아니메라면 잘 만들것이란 것은 확실했지만 아직은 신인이였던 때다.

나중에 츠토무 씨가 토토로의 모델이였다는 것을 알았다. "미야자키 씨가 저보고 가만히 서있으라고 하더니 저를 바라보면서 토토로를 그리더라구요." "알것 같기도 하군요."

토토로의 모델로서 사용되어도 아무렇지 않은 태평한 사나이가 데빌맨의 감독을 할 수 있을까 불안하긴 했지만 막상 작업이 시작되자 츠토무 씨는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박식한 이론가로서 모든 일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인데다 데빌맨의 팬이였던 것이다.

감독(츠토무)은 비디오판을 원작 만화판의 내용 그대로 만들기를 고집하였으며 시나리오 작가를 따로 쓰는 대신 직접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시나리오는 따로 필요하지 않아요. 만화 만으로도 충분한 콘티가 돼요." "흐음."

이 예쁘게 생긴 시레느는 코마츠바라 카즈오 씨가 만들었다. 그는 TV판 그렌다이저의 캐릭터 디자인을 지휘한 사람이다.

데빌맨 관련 상품은 많이 있다. 이 셔츠는 폭주족들이 좋아한다고 한다.

데빌맨 비디오. 왼쪽이 "요조 시레느", 오른쪽이 "탄생."

시레느 편에 나오는 미키는 "키키의 택배 서비스" 스태프가 그렸기 때문에 웬지 키키를 많이 닮은 모습이 되었다. 미키의 성우는 옛날 전대물의 주인공인 코우야마키 잔 씨.

"탄생" 편의 비디오판은 굉장해서, 나는 감동을 큰 감동을 받았다. 다음편인 시레느 편은 더욱 훌륭했다.

감독은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에 더 큰 제작예산을 마련할 때까지는 속편을 만들지 않겠다고 했다. "언젠가는 최상의 작업조건 하에서 데빌맨을 꼭 만들겁니다! 하 하 하" 나는 토토로 감독만 믿고 기다리고 있다.*

*현재 데빌맨 비디오아니메는 그 세변째인 묵시록편까지 제작이 되어 있다

개그만화는 우스운 부분이 어떻게 결말이 날지 다 알면 그리는 재미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건이 어떻게 전재될지 미리 정해놓지를 않습니다. 일부러 줄거리의 윤곽만 잡아 놓고 시작하는데, 이야기를 막상 진행시켜 보면 사건의 방향이 예상치 못한 쪽으로 가기도 합니다. 그럴때는 작가인 저도 소리내어 웃습니다. 이런 방식이 아니면 작업하는 재미가 없지요.

이런 식으로 오랫동안 만화를 그려왔던 터라 저는 결말이 어떻게 될지 생각을 안하고 줄거리를 진행시키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데빌맨TV 아니메를 만들 때에는 세세한 이야기는 많이 빼놓고 했기 때문에, 저는 시청자들에게 별다른 설명도 없이 갑자기 악마들의 세계에 뛰어들게 한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TV에는 나오지 않는 아스카 료 라는 캐릭터가 만화판의 해설자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원래 료는 아키라를 마계로 인도하기만 하면 되는 역할이었습니다. 그래서 아키라가 악마로 변신한 다음에는 료는 죽도록 되어 있었죠. 아키라가 "나를 이 저주받은 지옥에 홀로 내버려두고 가느냐" 는 대사를 말하는 장면이 바로 료의 최후였습니다.

그런데 다음 주 연재를 할 때 제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료는 죽지 않고 악마 아키라의 동반자가 되었죠. 그러면서 료는 그 성격이 변하여 보다 강한 리더 타입의 캐릭터로서 데빌맨조차도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료의 존재는 수수께끼가 된 것이죠. 악마와 합체하지도 않았고, 그 자신이 악마인 것도 아니면, 료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만화를 그리는 저도 그것이 점점 궁금해졌습니다. 료 라는 캐릭터의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앉아서 고심한 결과, "료=사탄"으로 하는 것만이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귀결이었습니다. 만화 연재 시작시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설정이죠.

료가 사탄이라는 것은 즉 료가 아키라를 배신하고 그와 싸워야 한다는 뜻이였기에, 이후의 이야기의 전개는 저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결국 아마게돈까지 일어나고 말죠.

료가 타천사라고 정해지면서 그는 정해진 성별이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천사들은 성별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천사들이 완전한 존재라면 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개의 성을 모두 갖고 있는 것이 타당하겠죠 (제 생각에는). 인간들도 결혼을 하므로써 평온을 찾지요?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결혼을 통하여 영혼의 완결성을 획득한다고 하면, 가장 완전한 존재는 자웅동체여야 하리라는 것이 제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웅동체 료가 예상외의 인기를 얻더군요. 그 다음부터는 "이런것도 그려도 되는구나"는 생각에 이것저것 좀 걱정스러운 것들을 많이 그려 넣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캐릭터라면 우선은 절대로 아키라입니다. 그 다음에는 시레느와 료 이고, 다음으로는 아마 미키 (마키무라) 겠죠. 저는 아키라와 마음이 잘 맞습니다. 비디오 아니메를 만드는 동안 감독이 "아키라는 어떤 인간인가요?" 라든가, "료의 캐릭터는 확실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아키라는 설명이 부족해요" 등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만화를 그릴 당시, 아키라의 생각이나 그가 하는 일 등은 제 자신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별로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거든요,. 하지만 료 같은 캐릭터의 경우 "료 같은 사람이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할까" 곰곰히 생각을 해야 했고, 또 "시레느처럼 아름답고 강한 캐릭터라면 이런 경우...." 등등의 생각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저의 성격과 가장 흡사한 것은 식은 두부지요.

저는 시레느가 참 좋았습니다. 시레느의 장 마지막 부분에서 그녀는 악역의 귀감이였죠. 데빌맨이 시레느의 날개를 찢어버렸을 때는 속으로 시레느에게 많이 미안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머리를 그렇게 맞으면 얼마나 아플까 따위의 생각을 했었죠.

당시 폭력장면을 그리면서 어떻게 하면 더 강렬한 느낌을 줄까 여러 가지로 연구했던 기억이 납니다. 대나무를 깎은 것을 펜 대신에 써보기도 하고, 일반 종이 대신에 거친 질감이 있는 스켓치패드를 써보기도 하고... 이런 기법을 시도한 만화는 데빌맨이 처음이 아닐까 합니다.

데빌맨을 처음 연재한지 26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지만 많은 분들이 아직도 좋아해 주시는 이유는 이 작품이 우리 사회의 이면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만화를 그리는 것은 사물의 표면 너머에 있는 것들, 양지가 아니라 그늘에 감춰진 것들을 표현하고 싶어서입니다. 데빌맨은 그런 그늘을 상징하고 있구요.

불쾌한 것들을 감추는 것이야말로 우리 일본 사회의 중심축이 아닌가요? 간혹 범죄라는 형태로 표출되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어두운 것들은 눈에 뜨이지 않는 법이죠. 그런데 요즈음은 엽기가 오히려 표준(norm)이 된 듯, 사회의 이면에 있던 것들이 점점 드러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데빌맨 독자들 중에도 엽기적인 것을 기대하면서 읽으시는 분들이 있으실 수도 있겠군요. 데빌맨 만화를 읽으면서 데빌맨이 "잔인한" 짓을 하기를 기대하는 분들 말입니다. 사실 원작 만화에는 그런 부분이 가득하기 때문에 만족하면서 읽으실 수 있을 테죠. 엽기적인 부분을 좋아하시는 독자분들은 만화 속에서 일상의 현실 세계보다 훨씬 폭력적인 세상을 추구하는 것일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 따위의 잔인함으로 가득합니다. 우리 사회에도 전쟁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지요. 역사는 되풀이 되고, 지금은 평화롭지만 우리는 다시 어두운 시대를 향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데빌맨을 읽으실 땐 그런 어두운 시대를 대비한다는 기분으로 읽어 주세요. 인간의 힘만으로는 시대의 흐름을 바꿀 수 없을 때도 있으니까요.

데빌맨은 어두운 시대가 오기를 바라면서 그린 만화가 아닙니다. 그런 시대를 피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요. 그것을 생각하면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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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영원제타 2006/06/14 19:50 # 답글

    데빌맨… 저는 그냥 마징가만 보렵니다. 왠지 취향이 아닌 것 같습니다.
  • Werdna 2006/06/15 08:26 # 답글

    영원제타님 // 데빌맨과 그 속편격인 바이올렌스 잭은 나가이 고 월드의 "이면"이라고도 하죠... 세상의 어두운 면만을 부각시킨.
  • GamerDash 2006/07/18 16:30 # 답글

    안녕하세요. 데빌맨 너무 재미있게 본 작품인데 이런 뒷 이야기를 보게되어서 기쁩니다.
    그리고, 링크해갑니다.
  • Werdna 2006/07/19 08:57 # 답글

    게이머대쉬님// 오 데빌맨을 보셨군요. 나가이 고가 일생의 최고 걸작이라고 자부하는 작품인 만큼 스토리의 완성도가 높지요. 하지만 의외로 짧다는게 조금 아쉬운 점입니다.
  • 카코포니 2006/07/24 02:57 # 답글

    잘 읽고 갑니다...
    데빌맨은 정말 원형질적인 광기와 고독, 그리고 인간에 대한 슬픔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작품이라서 정말 기억에 깊숙히 각인된 작품입니다.
    그로테스크한 잔인함에서 악마적 탐미까지...그 라스트씬은 절대 못잊을꺼 같습니다.
  • Werdna 2006/07/24 11:36 # 답글

    카코포니 님// 감사합니다. 참고로 OVA 판도 꽤 잘나왔습니다.
    닉네임이 멋지군요.
  • 잠본이 2015/08/16 18:37 # 답글

    되게 늦은 덧글이지만 각본가 이름은 츠지 마사키[辻 真先]의 오타인 것 같습니다. 영어 번역자가 실수한 듯.
    OVA판 미키의 성우는 코우야마키 쥰[高野槇 じゅん]인데 <시공전사 스필반>에서 다이아나를 맡았던 스미카와 마코토[澄川 真琴]의 예명이군요. 한때 액션배우로 뛰시다가 비극의 여주인공 목소리 연기라 되게 특이한 이력;;;
    https://ja.wikipedia.org/wiki/%E6%BE%84%E5%B7%9D%E7%9C%9F%E7%90%B4
  • 워드나 2015/09/14 16:36 #

    한달만에 블로그에 와보니 잠본님이 덧글을....
    OVA판 미키의 성우 연기는 아직도 잊혀지질 않습니다. 그 캐릭터의 최후가 워낙 처참하다 보니...
    성우분도 연기하시면서 정신적으로 트라우마가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죠.

    일어로 된 원문을 영어로 번역하고 그걸 제가 또 중역하다 보니 역시 오류가 있네요 --;
    일어 원문을 바로 번역했으면 좋았겠지만 (또 요새 블로거 분들처럼 깔끔하게 식자까지 하면 더 좋겠지만) 제 능력이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 화창 2019/01/23 12:26 # 삭제 답글

    넷플릭스로 개봉한 데빌맨 크라이베이비를 보고 간만에 데빌맨 자료를 찾아보다가 오게되었네요. 팬들에게는 굉장히 흥미로운 내용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 ㅇㅇ 2019/03/02 16:54 # 삭제 답글

    데빌맨이 유명하다는 것만 알다가 크라이베이비를 먼저 보고 원작까지 따라온 팬입니다. 이 인터뷰를 보니 나가이 고는 확실히 폭력의 위험성을 알고 그리는 사람이며, 인간에게 도사린 어두운 밑바닥을 잘 알면서도 그 바탕에는 세상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깔려 있는 가치관의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번역에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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