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그래도 일을 한다는 행복


"작업실" (창고라는 설도 있음)


작년 크리스마스에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린 뒤로 8개월이 지났습니다만,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저는 (어떻게 보면)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십수년간 본업으로 삼아 왔던 직종을 하루아침에 접고, 거의 관계가 없는 직종으로 전환하고 난 뒤 그야말로 꽉 찬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죠.
결코 일감이 떨어지는 법이 없고, 제가 일한 만큼 확실한 벌이가 되므로 상당히 좋은 직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쁜 점이라면 역시 너무 바쁘다는 점. 하루에 12시간 정도, 주말도 거의 없이 일해야 합니다.
프로젝트들의 납기일이 상당히 빡빡하고, 또 하나의 프로젝트가 끝나면 하루의 틈도 없이 다음 프로젝트가 주어지기 때문이죠.

"도대체 하는 일이 뭔데?" - 번역입니다. 우리말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인데, 소설처럼 재미있는 번역이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램, 논문, 임상실험 프로토콜, 기업의 내부용 문건 등 기술적, 학문적 번역이 대부분이라, 토씨 하나도 틀려서는 안 되는 것들이 많죠. 간혹 우리나라 온라인 게임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도 하는데, 이런 경우는 나름 재미있기 때문에 기분전환이 됩니다.

그런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게 되고,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컴퓨터로부터 떨어지고 싶게 됩니다.
블로깅을 폐업하다시피 (...폐업 "하다시피"?) 하게 된 것도 그 이유 때문이랍니다. 한시간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집 주변을 산책하거나, 하다못해 자전거를 끌고 라면이라도 사먹으러 나가지, PC를 붙잡고 블로깅을 하게 되지는 않더라구요.

투어링용 자전거.


아이러니컬하게도, 제가 처음에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스 번역을 시작할 때만 해도 꽤나 여유로운 보헤미안 라이프를 꿈꾸고 있었더랬습니다. 한달에 3주만 일하고 나머지 일주일은 여행을 즐기겠다는 당찬 꿈이 있었죠. 심지어 자전거로 3~4개월 정도 여행을 하면서 우리 나라의 숨겨진 (숨겨졌다기보다 제가 여태까지 본적이 없는) 모습들을 직접 보고 느끼겠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 두었고, 그 용도로 전용 자전거까지 준비해 두었습니다 (위 사진).

"그러면 일감이 들어와도 안 받으면 되잖아?" - 사실 수입을 계산해 보면 금전적으로는 그래도 되는 상황인 듯 합니다만, 이 바닥에서는 "믿을 수 없는 번역자는 필요없다" 는 것이 규칙인 듯 합니다. 즉 언제든지 일을 맏길 수 있고, 언제나 기한 내에 일을 깔끔히 처리하는 사람만이 일거리를 계속 받을 수 있는 모양이더군요. (하긴 어느 직종은 안 그렇겠습니까만...)
게다가 제가 하는 일이 일반 번역과는 좀 차이가 있는 일이다보니, 다른 번역자가 제 일을 대신 하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래서 일거리가 주어질 경우 "아, 좀 놀려구요" 운운하기가 극히 어렵네요.
하지만 지금같은 경제상황에서,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많아서 힘들다는 것은 과분한 복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뭏든 그런 상황이 8개월 넘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네요.
오늘은 오랫만에 잠깐 여유가 생겨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by Werdna | 2009/08/10 16:44 | 기타등등 | 트랙백 | 덧글(17)
트랙백 주소 : http://Werdna.egloos.com/tb/5036759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theadadv at 2009/08/10 23:10
오오... 척박한 국내 번역계의 신성이 되시길~
Commented by FEOHEIM at 2009/08/11 03:44
아아~ZAKURER™님도 그러시고 Werdna님도 번역을 하시는군요.
저도 일본어 번역을 하려 합니다만, 굳이 변명을 하자면 인맥부족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건강 유의하시고 힘내시길!!
Commented by glasmoon at 2009/08/11 09:14
너무나 장기간 두문불출하셔서 무슨 사고치고(?) 해외도피(??)라도 하셨나 했습니다. ^^;;
바쁜 이유라면 좋은 것이죠. 누구 말에 따르면 바쁘게 일할 수 있는 것도 한철이라나.
전 요즘 선물용 자동차 공장 돌리느라 무지 바쁘네요. ^^;;;;
Commented by Werdna at 2009/08/11 11:38
달소년님 // 그게... 척박한 것은 문학번역 쪽이고, 제가 하는 일은 실용번역이라 좀 거리가 있습니다만... 그래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

FEOHEIM님 // 제가 가장 부러워하는 분이 자쿠러님인데... 그분은 좋아하시는 분야의 번역을 하시는 분이시죠. 저는 좋건 싫건 맡기면 번역하는 직종이랍니다. FEOHEIM님도 번역 쪽에 관심이 있으셨군요...
FEOHEIM님도 건강을 잘 챙기시구요~

유리달님 // 사고 쳤다고 할 수 있죠. 이 나이에 여행한다고 직장 때려치고 프리랜스로 업종전환했으니...
가장 기가 막힌 것은 여유를 누리겠답시고 직업을 바꿨는데 전보다 세배 더 일이 많아졌다는 것.
제 작업실(?)은 지금 택배상자에서 꺼내지도 않은 플라모델들의 창고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영화는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젠지 기억도 안나는군요 (1년 넘은 듯).
그래도...바쁜 것이 복이죠? 그렇죠?
Commented by FAZZ at 2009/08/11 13:00
일없는 것보다는 바쁜게 100배는 복 맞죠 ^^
그래도 근황을 들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Commented by zolpidem at 2009/08/11 20:11
오오..건강하신 모습에 반갑고 기쁘네요.
하루키의 '1973년의 핀볼'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원하시는 경제적 여유와 시간적 여유의 조화를 이루시길 바라겠습니다.
Commented by Werdna at 2009/08/12 10:41
FAZZ님 // 그렇긴 합니다만 애당초 직업을 바꿀 때 예상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프리랜스가 월급장이보다 더 바쁠 줄이야 OTL)
FAZZ님도 잘 지내시는지요.

zolpidem님 // 건강은 오히려 전만 못합니다. 종일 책상에만 앉아 있으니 다리가 흐물흐물해지고, 허리는 쑤시네요.
그 하루키 작품은 제가 모르는 작품인데,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제 현재 상황을 잘 나타내 주는 다른 문학 작품으로는 W. W. 제이콥스의 "원숭이의 앞발" 이 있습니다. ^^
Commented by zolpidem at 2009/08/13 00:44
'양을 둘러싼 모험' 이었는지, '댄스 댄스 댄스'였는지 가물가물한데,
그 작품에서 주인공이 '번역'일을 하는데, 업계 내에서 신용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 있었죠.
그 '번역' 일을 시작하는 것이 '네즈미 시리즈' 2탄인 '1973년의 핀볼' 이었습니다.
건강 유념하시구요.. '원숭이의 앞발'은 제목이 좀 끌리는군요. 함 찾아봐야겠네요.
Commented by Werdna at 2009/08/13 03:10
그게 원제가 "Monkey's Paw" 인데, "원숭이의 앞발" 로 검색하니까 뜨는 것이 없군요. 좀 오래된 단편이라...

간단히 요약하자면, 세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요술 아이템을 손에 넣은 부부가 첫번째 소원으로 돈을 벌어보려고 했더니 아들이 죽어서 보상금을 타게 되고, 두번째 소원으로 아들을 돌려달라고 했더니 무덤에서 좀비가 되어 돌아오더라~ 뭐 대충 그런 내용입니다. (세번째 소원으로는 좀비 아들을 다시 무덤으로 돌려보낸다는...)

즉, "소원을 빌 때는 조심하라. 정말 이뤄질 수도 있으니" 라는 교훈(?)을 담은 작품 되겠습니다. (제 2008년 목표가 프리랜스 전직이었거든요;)
Commented by zolpidem at 2009/08/13 17:33
검색해보니 옥스포드 어쩌구 하는 원서가 뜹니다.
가격도 저렴해서 주문할까 하고 있습니다.
동화(?)였군요!!
Commented by Werdna at 2009/08/14 21:34
어, 돈주고 사지 마세요. public domain 으로 전환된 지 오래입니다 (1902년 작품이라...)
게다가 엄청 짧은 작품이라....
여기 공짜로 읽을 수 있는 사이트도 있네요: http://gaslight.mtroyal.ca/mnkyspaw.htm
Commented by stonevirus at 2009/08/13 23:40
바쁘시다니 다행입니다[응?]
갑자기 아는 번역가분중에서 먹고사는데 걱정이 없어서 여유있게 골라서 일하시는 분이 정말 부럽다는 생각이...;;;
부디 시간 여유가 좀 더 나시기를
Commented by Werdna at 2009/08/14 21:36
그런 분이 계셨군요... 저도 정말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Commented by nor3 at 2009/08/15 04:05
근황이 무척이나 궁금했는데
비록 바쁘신 와중이지만 그래도 잘 계시는 듯 하니
괜시리 저도 기쁘네요
종종 블로그에 안부 올려주시길 바랍니다
Commented by Werdna at 2009/08/15 19:45
제가 없는 동안에도 자주 들러주시고...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도 종종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Commented by draco21 at 2009/08/20 02:58
에구.. 아흐레나 지나서야 알았습니다. ToT 별고 없으셨고 그저 바쁘셨군요. ^^:

그저 하시는일 원하시는 일 다 잘되시길. ^^:
Commented by Werdna at 2009/08/21 21:45
예, 그런데 요새 며칠동안 꽤 한가하네요.
제가 주로 일을 하는 회사가 여의도 63빌딩에 있는데, 거기 신종플루가 퍼져서 회사들이 문을 걸어잠근 것과 무관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draco21님도 잘 지내시는지요? 항상 건강하시길 빕니다.

:         :

:

비공개 덧글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